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설화 중 하나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 있습니다. 이 피리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왕권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신비로운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만파(萬波)’는 만 가지 파란, 즉 크고 작은 위기를 의미하며, ‘식(息)’은 그것을 잠재운다는 뜻입니다. 즉, 만파식적은 모든 재난과 혼란을 잠재우는 신비로운 피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전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제31대 왕인 신문왕(神文王)이 얻게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신문왕은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의 아들로,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추진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국가를 보호하는 상징으로 만파식적 전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부터 만파식적이 탄생한 배경과 그 신화적 의미, 그리고 국악적 관점에서의 해석까지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2. 신문왕과 만파식적의 탄생 배경
(1) 신문왕의 시대적 배경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정치적 혼란이 많았습니다. 귀족 세력의 반발, 고구려·백제 유민의 저항, 그리고 외세(당나라)의 간섭 등으로 인해 신라는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문무왕(文武王)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신라는 당나라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본래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통일 직후 신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뿐만 아니라 당나라 세력과도 대립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특히 당나라는 한반도 내에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의 직접적인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결국 신라는 당군과의 전투를 감행해야 했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외세를 몰아낸 이후에도 신라는 삼국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 불만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많은 유민이 신라에 편입되었으나 이들은 신라 중심의 통치에 반발하였습니다. 기존의 신라 귀족들은 이들을 포용하기보다는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곧 내부적인 불안정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고구려 출신의 장수 안승(安勝)은 당의 압박을 피하여 신라에 망명했으나, 신라의 정치적 입지를 견제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문왕이 즉위하면서 신라의 새로운 정치 질서를 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신문왕은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를 개혁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신라의 국가적 통합을 상징하는 요소를 강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만파식적 전설이 등장하게 됩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정치적 혼란이 많았습니다. 귀족 세력의 반발, 고구려·백제 유민의 저항, 그리고 외세(당나라)의 간섭 등으로 인해 신라는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신문왕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적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2) 만파식적 전설의 내용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 즉위 후 어느 날 한 신하가 들어와 왕에게 말했다.
"전하, 동해에 없던 섬이 나타나서 백성이 불안해 하는데 더욱 불안한 것은 섬 위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밤에는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낮에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기이한 모습이옵니다. 그말을 들은 신문왕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가니 갑자기 안개가 서리고 파도가 일어나 여드레 만에 걷히고 용이 나타나 이 대나무는 문무왕이 보내는 것이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온 나라의 위기가 사라질 것입니다."
즉시 명하여 이를 베어와 피리를 제작하게 하였고, 완성된 피리는 놀라운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피리를 불었을 때 궁궐 안에는 온화한 바람이 불고, 백성들의 고통이 해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신문왕은 이를 국가의 보물로 삼고, 왕실의 보물 수장고인 천존고에 보관하고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연주하도록 하였습니다.
(3) 문무왕과 용이 된 김유신
이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는 문무왕과 김유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한다는 신화입니다. 문무왕은 생전부터 "나는 죽은 후에도 나라를 지키겠다"라고 선언했으며, 실제로 그는 동해에 자신의 유해를 묻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명장 김유신 역시 사후 용이 되어 문무왕과 함께 신라를 수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화적 설정 속에서 만파식적은 두 용왕(문무왕과 김유신)이 신문왕에게 하사한 국가 수호의 신비로운 악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3. 만파식적의 의미와 정치적 활용
(1) 왕권 강화의 도구
만파식적은 단순한 피리가 아니라, 신라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신문왕은 이 피리를 통해 신이 부여한 왕권을 강조하며, 왕의 권위가 절대적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시 신라의 정치 체계는 귀족 세력의 힘이 강했는데, 만파식적 전설은 귀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 외세 및 내부 반란 진압
전설에 따르면 만파식적을 불었을 때: 왜적이 신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만파식적의 신비한 힘으로 인해 침략이 중단됨 내부 반란이 일어나려 할 때, 피리를 불자 반란군이 해산됨 기근과 질병이 사라지고 나라가 태평해짐
이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실제 신문왕이 외교적·정치적으로 매우 신중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국악적 해석과 전통 대금과의 연관성
현재 만파식적이 실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설화를 통해 신라에서 횡적이 중요한 악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대금처럼 가로 부는 젓대는 고구려 고분벽화 및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 관련 기록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대금의 신라 연원설이 좀 무색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보편적인 횡적에서 대금이라는 고유 이름을 가지고 통일신라의 악기로 재탄생되는 과정이 만파식적 일화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다. 즉 대금은 다른 횡적 종류의 악기와 달리 청공이 있고 그 악기 이름을 대금이라 하였으며 대금.중금.소금 등 세 가지 관악기가 한 틀을 이루어 신라 삼죽으로 정착된 것은 분명히 이전의 횡적 전통과 차이 나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다의 용왕이 안내한 데로 대나무를 베어 악기를 만들었다는 만파식적 일화는 곧 대금의 탄생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4. 결론: 신라의 평화를 지킨 신비로운 피리
만파식적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신라의 역사와 정치적 맥락을 반영한 중요한 전설입니다.
만파식적 일화에서 젓대가 잠재웠다는 만 가지 파란이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정치적 소요나 민심의 동요 등을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수습되기까지 신라에서는 음악을 통한 평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큰 효과를 거둔 것이 만파식적의 상징이라는 해석입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악기 횡적을 주제로 한 이 설화가 결국 패망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활용하여 삼국 화합의 서곡을 울리게 된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견해는 더욱 의미있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