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3261 님의 블로그

diary3261 님의 블로그 입니다.

  • 2025. 3. 17.

    by. diary3261

    목차

      1. 무애가의 탄생과 원효대사의 가르침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승려이자 사상가였던 원효대사는 불교를 널리 전파하며 많은 백성에게 불법(佛法)을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원효대사는 617년(신라 진평왕 39년)에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지만, 요동 지역에서 하룻밤 머무르는 동안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음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구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그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대중에게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원효의 노래 무애가와 향악 정재 무애무



      원효대사는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경전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의 핵심 사상을 쉽게 설명하는 방식을 고민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탄생한 것이 바로 **무애가(無碍歌)**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어느 날 원효대사가 광대들에게 큰 박을 받아 이를 '무애'라 이름 붙이고, 그것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원효대사는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즉 모든 것을 걸림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화엄경의 구절을 바탕으로 무애가를 지었고, 이 노래를 통해 백성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했습니다. 이는 문자가 익숙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불교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이러한 친숙한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하며, 누구나 쉽게 불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 무애가에서 무애무로, 고려시대 향악 정재로 전승

       

      무애가는 고려 시대까지 전해져 향악 정재로 자리 잡으며 **무애지희(無碍之戱)**라는 공연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따르면 무애가는 고려 궁중에서 향악 정재로 연행되었으나, 그 가사는 불교 용어와 방언이 많이 섞여 있어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불교가 국가의 주요 이념이었던 고려 시대에도 지역적, 문화적 차이를 반영한 다양한 언어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무애가는 단순한 경전의 암송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풍의 노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백성들이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쉬운 가락과 반복적인 멜로디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특징은 당시 구전 문화 속에서 널리 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무애가는 신분을 뛰어넘어 귀족과 평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였으며, 민중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문무왕의 동생인 차득공의 일화가 전해집니다. 차득공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사처럼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든 채 백성들 사이를 떠돌며 민심을 살폈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 사회에서는 유랑하는 거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노래와 악기를 통해 불교와 신앙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무애가는 이러한 유랑 거사들에게도 적합한 노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들이 방방곡곡을 다니며 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히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부르며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더욱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3. 조선 후기의 무애무 재연과 의미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조에 '예조에서 무애 정재는 그 가사가 오로지 불가어를 써서 탄망하므로 그 수호는 모든 사악에서 무애정재를 없애라고 한 데 대하여 임금이 허락하였다'라는 것으로 보아 악학궤범에 무애무가 빠진 듯합니다. 그러나 순조 29년(1829년)에 기록된 **진찬의궤(進饌儀軌)**에 무애무의 연행이 명기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도 무애무가 궁중 연회에서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무애무는 불교적인 색채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시대보다는 궁중 오락적 성격이 강한 형태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조선 후기의 문화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유교적 예법을 기반으로 한 궁중 정재 안에서 불교적인 요소가 일부 남아 있는 형태로 전승된 것으로 보입니다.

       

      4. 일상에서 무애가

       

      무애가는 원효대사의 일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춤과 음악으로 표현한 전통 예술입니다. 이 춤과 노래는 불교의 무애사상을 담고 있으며, 누구나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원효대사의 지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애가의 전통은 일상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이 절에 다니면서 염불을 할 때 '관세음보살'만 반복하며 음률을 넣어 외우는 모습을 보면, 무애가의 지금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복잡한 경전을 외우는 대신, 짧고 반복적인 운율을 가진 구절을 통해 신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무애가가 백성들에게 쉽게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짧은 염불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하며, 경전을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애가를 통해 불교 사상이 어떻게 예술과 결합하여 대중들에게 전달되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무애가와 무애무의 의미를 조명하고 보존하는 노력이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효대사는 신분을 떠나 누구나 쉽게 불법을 만날 수 있게 일상에서 부르는 노랫가락에 염불을 얹어 글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배움이 깊거나 배움이 얕거나 젊거나 나이 들었거나 즐겁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했습니다. 이러한 애민 정신은 지금 많은 갈등과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옛날 원효스님이 길거리에서 백성들과 어울려 신명나게 박을 치며 노래 부르며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정신을 잊지 않아야 겠습니다.